딸들에게 쓰는 편지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2) 최고의 공부는 놀기다

dotoday77 2012. 5. 8. 16:28
ㆍ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ㆍ사회·관계 경험하는 ‘놀이’… 배우는 게 아니라 깨닫는 것

요즘 아이들은 바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여러 정해진 교육을 받아내야 한다.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라고 정해 놓은 것들을 ‘선행학습’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미리 배우는 것도 모자라 ‘재능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예체능 분야까지 각종 학원을 맴돌아야 한다.

학원을 마치고 난 뒤인 저녁, 심지어 심야에 집으로 돌아와도 아이가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이 학원 저 학원에서 내준 숙제가 쌓여 있다. 뒷전으로 미뤄둔 학교 숙제까지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아이가 비정상이다.

세대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모들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까지 바쁘게 보내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어느 동네 할 것 없이 주택가 인근은 해가 저물 때까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동네를 가득 채웠다. 비록 사회는 지금보다 덜 민주화되고 덜 풍요로웠지만 아이들에게는 더 행복한 세상이었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텅 빈 놀이터 서울시내 한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가 7일 오후 뛰어노는 어린이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이 같은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의 극명한 차이는 ‘놀이문화’의 있고 없음에서 비롯된다. 고무줄, 공기놀이, 딱지치기, 비석치기, 술래잡기, 실뜨기, 자치기, 제기차기 등은 어느새 사라졌다. 이런 놀이를 하면서 뛰고, 숨고, 쫓고, 찾는 과정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의 얼굴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든 ‘유물’이 돼가고 있다.

2009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각국의 통계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아동·청소년 생활패턴 국제 비교분석 보고서’를 보면 한국 아이들은 평일 하루 평균 7시간50분을 공부에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영국 아이들의 2배가 넘는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고 있는 수치다. 수면 시간은 조사 대상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 중에서 가장 적었고, 사교육에 쓰이는 시간은 가장 많았다. 학교 안팎에서 공부하고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가 아이들의 놀이 시간인데 한국은 이 시간이 선진국의 아이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이 놀지 못하는 사회는 과연 바람직할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아이들이 뛰놀지 못하는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학업 스트레스, 뛰어다니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다양한 형태로 아이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이전에 드물었던 집단 따돌림이나 늘어만 가는 아동·청소년 자살은 이 같은 스트레스가 병리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문제는 이 같은 병리적 현상이 흔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사회는 대증요법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 대표는 “옛 어른들은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것을 자식 농사에 비유했다”면서 “모내기, 김매기, 추수 등 때맞춰 꼭 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는 농사처럼 자녀 교육에서도 나이에 따라 아이가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서운 것은 농사는 망친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지만 자식 농사는 제때 일을 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겉보기에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초등학생과 그 이전 단계의 아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은 ‘놀이’와 ‘놀기’이고 전 인류가 그것을 원칙처럼 지켜왔는데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무너져 있다”고 말했다.

지금 부모들은 아이가 커가는 시기마다 아이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나이에 맞는 영어 교재가 무엇인지, 학원은 어디가 잘 가르치고 통제하는지를 알아보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마음이야 놀게 해 주고 싶지”라고 말하면서도 아이가 성적 경쟁에서 뒤처지지는 않을지 부모의 기준으로 아이를 재단하면서 아이를 놀이에서 강제로 떼어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부모의 심리를 읽은 사교육 업계에서는 놀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할머니 세대가 보면 “그런 것도 가르치느냐”고 할 만한 전래놀이가 버젓이 유아교육 과정에 들어 있거나 이를 아예 전면에 내건 학원들이 성업 중이다. 놀이도 소비의 대상이자 교육 수단의 하나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 놀이운동가 편해문씨는 “놀이는 오로지 놀면서 느낄 수 있고 그 재미있는 느낌을 아이들과 함께 느끼는 것이지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학교와 학원에서 아이들을 놓아줘야 아이들과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활기가 넘친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놀이가 사라지면서 잃는 것은 단지 신체적 건강만이 아니다. 예전의 아이들이 했던 놀이는 대체로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래나 동네 형·누나·언니·오빠들과의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음을 깨우치고 그들과 나의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삶과 죽음의 의미도 어렴풋이 터득하면서 그들 나름의 사회생활을 배운다. 이런 관계 형성의 경험이 부족하면 이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놀이에 굶주려온 지금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우선 놀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내 자식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른들의 불안은 기우다. 아이들조차 ‘이렇게 놀아도 될까’라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사회에 ‘반 놀이문화’가 만연해 있지만 이는 아이들이 가진 자연적인 노는 힘을 믿으며 지켜보면 된다. 언제까지 남을 탓하기만 하면서 다 같이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가. 더 이상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옭아매지 말자. 아이를 묶어두어 치르게 될 사회적 희생을 차치하더라도 아이를 마음껏 뛰놀게 하는 것은 그들을 살리는 약속인 동시에 어른이 살아나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