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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쓰는 편지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1) 지금 행복해야 한다

ㆍ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6살 나연이 학원숙제 안 해 매일 야단맞고
초등 2년 정아는 숙제 모두 끝내면 밤 12시… 행복할까요?


서울 목동에 사는 6살 나연이는 1년 전부터 밤 10시 넘어 그것도 울면서 잠드는 날이 많다. 영어유치원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끝내 엄마에게 야단맞은 뒤에 하는 게 일상이 됐다. 나연이는 이제 공부나 숙제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서울 삼성동이 집인 초등학교 2학년 정아는 토요일도 없이 일주일 내내 저녁까지 꽉 차 있는 학원 스케줄을 따라가느라 바쁘다. 게다가 집에 와 학원과 학교 숙제까지 마친 뒤 정아가 잠자리에 드는 시각은 밤 12시. 친구들과 놀 시간은 물론 없다.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끼는 때는 학원 수업 중간에 잠깐 허락된 컴퓨터 게임 시간이다. 그런 정아에게 최근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그동안은 눈치를 보면서도 엄마의 교육 스케줄을 곧잘 따라왔는데 요샌 툭하면 떼쓰고 우는 것이다. 엄마도 정아가 안쓰럽고 불쌍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행복하게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느라 엄마도 애를 쓰고 있다.

학교→ 학원→ 학원→ 학원→ 집으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도로에서 4일 학원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들이 집에 가기 위해 학원버스로 향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의 인생은 준비기와 본격기 인생이라는 두 부분으로 명확히 갈린다. 어느 한순간 귀하지 않은 시간이 없지만 한국에서의 인생 전반기는 본격기의 행복을 준비하는 시간으로만 존재한다. 이 시기 부모와 자녀의 관계 또한 대학입학이라는 공통목표를 향해 기꺼이 뛸 준비를 하는 ‘선수와 코치’ 관계가 되어 버린다. 인생은 ‘현재의 합산’인데 19년간의 인생을 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의 행복을 유예당한 우리 아이들의 행복도는 통계로 여실히 증명된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행복도 꼴찌를 기록했다. 4일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총 679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어린이·청소년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주관적 행복지수는 69.29점으로 OECD 23개국 가운데 최하점이었다. OECD 평균인 100점보다 무려 30점 이상 낮다. 방정환재단이 2006년 유니세프 보고서를 기준으로 매년 국내의 실태조사를 해 온 결과 우리나라는 4년째 행복도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는 만큼 미래는 과연 행복할까. 부모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현재가 힘들수록 미래의 행복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지금의 행복을 희생해야 어른이 됐을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허구다. 행복은 순간순간마다 느껴야 하는 것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을 위해 당장의 행복을 미루면 영원히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고 행복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며 어렵사리 따낸 좋은 ‘스펙’이나 경제력이 행복과 절대적인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부모들은 ‘안정적인 생존의 조건’을 ‘행복의 조건’으로 오인하고 있다. 돈이나 물질적인 조건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만족하게 해 주지만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나 본인이 흥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내적 요인으로 결정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외적 조건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고 경쟁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아이와 부모, 사회를 모두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홍현주 한림대 성심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성격이나 인격의 기본이 형성되는 시기에 학습 쪽의 자극만 주다 보니 정서나 대인관계 등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아동기에 스트레스를 겪게 되면 즐거움을 잘 모르는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OECD 국가 어린이 행복지수 꼴찌
행복은 쌓는 것, 돈으로 살 수 없어… 경험하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해
행복수업 받고 난 뒤 긍정적 변화 “죽고 싶다”서 “시험이 전부 아냐”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낸 아이들은 명문대에 합격해도 행복하지 않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 교수는 “원하던 대학에 들어와서도 새로운 목표가 주어지지 않아 오히려 당황하는 학생들이 제법 있다.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또 다른 목표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고 말했다.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 대표는 “IMF 외환위기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면서 어린이들까지 경쟁으로 내모는 각박한 사회가 됐다”고 말한다. 생존의 위기에서 아무 보호를 해 주지 않는 국가의 실체를 바라보며 당연히 경제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고, 자녀들도 성공을 위해 일찍 준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도 “외환위기를 고비로 아이들이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인 직업인 의사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이들이 꿈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쟁체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을 질식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급식시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서로 먹겠다며 20~30분간 말다툼을 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국물통에 달라붙은 떡 하나, 돈가스 한 조각으로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마음의 허기가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눈에 띄게 난폭하고 거칠어지고 있다.

불행의 질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행복을 되찾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인생에서 10대는 다양한 경험과 배움으로 자신의 감성과 생각을 주체적으로 형성해 나가고 자신 앞에 펼쳐질 삶의 다양한 갈래를 그려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인생의 찬란한 봄이다. 그리고 행복은 계속 굶주리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능력이며, 일상 속에서 연습해야 하는 습관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경기 시흥 함현중학교는 전교생과 교사들이 행복을 일상 속에서 연습하고 있다. 행복수업을 맡은 손혜진 교사는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변했고, 한 명 한 명의 에너지가 학교와 지역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너희 집은 돈이 많아서’ ‘너는 예뻐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뿌리깊었던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현재의 모습, 당장의 삶을 아끼게 됐다는 것이다.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죽고 싶다던 아이들이 “시험이 전부냐”라고 말하게 됐다. 학생들은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으면 수업시간에 친구들, 선생님과 공유하려 하고, 각 반이 한 달에 한 번 영화도 보고 음식도 함께 해 먹으며 웃음을 나누고 있다.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작은 일에 감사하는 습관으로 아이들의 일상은 한층 행복해진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은 거창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맛있는 걸 먹을 때, 친구들과 수다떨 때, 부모님이 잔소리 안 할 때, 가족들과 여행갔을 때, 칭찬받을 때 아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지금 행복해야 한다. 사회와 아이들을 살리는 첫 번째 약속이다.